사랑이 가득했던 박수근의 예술 세계는?!
코너를 돌면 본격적으로 박수근의 작품들이 있습니다.
마치 돌 위에 그린 듯한 독특한 질감.
독특한 질감 덕에 과거를 회상하는 느낌.
그게 공감각 같은 거에요. 눈으로 작품을 보지만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는, 시각의 촉각화에요. 공감각적 심상.
박수근만의 화풍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전문용어는 마티에르. 한국어로는 질감.
마티에르는 물감이 화면 위에 만들어 내는 재질감입니다. 전 세계 회화 작품들 중 유일무이한 질감이에요. 자칫 투박해보이지만 토속적인 미감과 정서를 담은 박수근의 마티에르.
박수근의 마티에르 레시피.
캔버스에 물감을 층층이 바른다.
물감을 말린다. 물감을 긁어 그림을 그린다. 또 물감을 바르고 말린다. 또 긁어낸다.
바르고 말리고 긁고, 무한반복해야 합니다. 엄청난 노력과 정성이 필요해요. 단순한 그림체와 대비되는 풍부한 재질감으로 더욱 특별해지는 박수근의 작품.
백설기같은 하얀 마티에르, 마치 된장 같은 갈색 빛의 마티에르, 그리고 마치 돌에 끼인 이끼같이 초록빛이 감도는 마르티에까지.
마티에르가 모두 다른 이유는?! 기계처럼 표준화되어 있지 않고 모든 작품이 다른 시공간에서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어 박수근의 손에서 독창적으로 재탄생됩니다. 마치 모든 돌들이 다르듯이, 작품 하나하나 다른 시공간의 이야기를 담은 박수근.
그림엔 시대가 반영될 수 밖에 없거든요. 작품도 입상을 하고 아이도 낳았어요. 평양에서 가난하지만 행복한 신혼 생활을 하던 박수근. 금성 지역의 미술 교사로 일하게 됩니다. 가정 경제가 안정화된 시기, 급작스럽게 불행이 찾아옵니다.
첫째 아들이 1948년 뇌염에 걸려 목숨을 잃었어요. 그리고 또 아픈 역사가 있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죠.
초반엔 공산 체제의 인민군이 우세했으나, 금성 위쪽까지 탈환한 국군과 UN군.
국군 선전용 포스터와 플래카드를 제작한 박수근, 그런데 중국군이 개입을 하죠. 또 다시 공산 체제가 된 금성지역.
결국 피난길에 오른 박수근 가족. 그런데 그때 넷째까지 태어났었거든요. 갓난아이가 있어 속도가 더뎌지자 김복순 여사는 박수근에게 혼자라도 떠나기를 제안합니다. 자신과 아이들보단 박수근이 더 위험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남편을 떠나 보낸 복순. 그때부터 김복순 여사가 진짜 많이 고생을 합니다. 인민군에게 잡혀가서 고문을 당하는 거죠. 박수근의 행방을 묻는 갖은 협박과 고문을 당한 김복순. 한편 혼자 떠나온 박수근은 처자식 생각에 얼마나 가슴이 찢어졌겠어요. 그럼에도 우선 살아남아야 했기에 군산에서 고된 부두노동일을 시작합니다.
그렇게 가족을 그리워하며 눈물로 매일을 보냈는데 죽거나 미치겠다고, 지켜보던 이들이 걱정할 정도였다고 해요.
한편 박수근이 그토록 그리워한 복순과 아이들은 죽거나 미치겠다고 지켜보던 이들이 걱정할 정도였다고해요.
복순과 아이들은 버티다가 결국 남쪽으로 피난을 결심합니다. 2km쯤 걸었을 무렵, 뭔가 조명탄이 팡! 터져요.
머리 위에서 터지는 조명탄과 쏟아지는 포탄을 뚫고 가야하는 상황. 근데 김복순 여사는 그걸 보고 무슨 생을 했냐면
용기를 내 목숨 걸고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항상 전차가 다닌 길만 쫓아가셨대요. 지뢰가 터질 수도 있으니까. 전차가 지나간 길은 지뢰가 터질 위험이 없기에 그 길만 따라 한 걸음씩 이동해 피난민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포탄과 지뢰를 피해 춘천 피난민 대피소에 도착해 낸 복순. 그 과정에서 갓난아이였던 막내는 이미 목숨을 잃었어요. 갓난아이였던 막내는 피난길을 버티지 못하고 사망, 장녀와 차남만이 살아남게 됩니다. 춘천 보호소에서 우연히 듣게 된 소식.
박수근이 처남 집인 창신동에 있다는 것. 기쁜 마음에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바로 서울로 못 들어옵니다.
어쩔수 없이 안양 피난소로 이동을 합니다. 그곳에서도 쉬지 않고 갖은 방법을 강구하여 결국 창신동에 갈 방법을 찾아낸 복순. 아이들은 안양에 두고 홀로 창신동으로 향합니다. 박수근이 있다는 동생집대문을 열자 살아 돌아온 복순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그런데 박수근이 좋아하질 못하는 거에요. 자녀들이 안 보이잖아요. 홀로 찾아온 복순을 보고 아이들 생사부터 걱정하게 된 박수근. 건넌방 문을 열고 나오던 성남 아버지가 그 자리에 서고
정말 남편을 만난 것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그이가 동생과 인숙이, 성남이는 다 어떻게 되었냐고 물었다.
돈이 있어야 동생과 아이들을 데리러 가지, 하며 자꾸 우시기만 한다. 전쟁이 아니었다면 다 함께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이산가족이 다시 만나기 쉽지 않은 전쟁통, 기적처럼 재회한 박수근 가족. 다행히 안양에 있던 아이들 데려오는 것도 성공해서 창신동에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창신동에서 새출발하게 된 박수근 가족.
이 시기의 박수근이 그린 그림들은?!
맛깔나게 그린 박수근표 정물화.
두툼하고 오돌토돌했떤 작품들과 다른 굴비. 마티에르가 옅게 표현되어 있죠. 사실적 묘사가 더 돋보이는 또 다른 화풍이죠. 비싼 생선이라 귀했던 굴비를 그림에 선명히 담아 눈으로 맛보고 즐길 수 있게끔.
굴비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는데, 당시 박수근이 부르던 이름이 미스 박인 사람이 있어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 화랑인 반도 화랑이 있는데 이곳에서 그림을 팔아 돈을 번 박수근. 반도 화랑 직원이 바로 미스 박이에요. 그림을 팔러 매일 들락거리다보니 화랑에서 친해진 두 사람,
그런데 미스 박이 결혼하기전 약속을 못 지키고 세상을 떠난 박수근.
그런데 그 약속을 김복순여사가 지키세요. 결혼 선물로 손수 가져온 남편의 그림.
귀한생선인 굴비를 그려주신게 잘먹고 잘 살라는 마음으로 주셨나보다 그리곤 그림을 할 수 없이 팔게 되는데, 그 당시 굴비의 경매가는 얼마일까요?! 당시 2만 5천원에 그림이 팔렸어요. 이후 30여년 뒤 너무 죄송한 마음에 그림을 다시 되사는데 2억 5000만원.
미술관에 원작 소장품이 없단 걸 알게 된 미스박이 어렵게 되찾은 굴비를 쿨하게 기증했다고 해요. 돌고 돌아 박수근 미술관의 첫 원작품이 되었죠. 굴비를 기증한 미스 박의 정체는?!
갤러리 현0의 박명자 회장이라고 해요.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그림 한 점.
박수근을 사랑한느 대중들 품에 안겨주다. 궁핍했던 살림에 굴비는 못 줘도 그림 선물을 하던 그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림으로 남다.
출처: 선을 넘는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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